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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 (강문호 원로목사)

그 길, 막혔던 길(출 14;21-25.2018.8.26)
2018-08-05 16:58:23
강문호
조회수   1653

 


그 길, 막혔던 길.


 


14;21-25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정말 막막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울어도 못 하고 참아도 못 하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생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될 때로 되라고 인생을 막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할 가요?


 


모세가 10가지 재앙을 애급에 퍼부었습니다. 모세는 200만명 이스라엘 백성들을 400년 만에 해방시켰습니다. 모두 홍해까지 나왔습니다. 이 때 바로는 노예들을 다 내보내고 나니 사회가 마비되었습니다. 일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짓던 모든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벽돌 공장이 마비되었습니다.


각종 공장들이 쉬게 되었습니다.


농사 지을 사람이 없어 식량난이 발생할 것이 뻔하였습니다.


소 양을 돌볼 목자가 없어서 짐승들도 모두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들판에 익어가는 밀보리를 거둘 노동력이 없어졌습니다. 들판에서 곡식이 썩어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드리려고 따라 갔습니다. 마침 홍해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바로는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작전에 미숙한 분이로구나! 독안에 든 쥐다.”


 


무기가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탱크만 600대를 가진 애급 군대가 다시 잡아 가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습니다. 점점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급 군사였습니다. 앞으로 가도 죽음, 뒤로 가도 죽음이었습니다. 앞으로 가도 문제, 뒤로 가도 문제였습니다.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1. 포기한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2. 포기하지 아니한 모세가 돋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4: 11-12)


 


그러나 모세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13-14)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홍해에 지팡이를 내어 밀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홍해로 내밀었습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14;21)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널 때 양 쪽으로 물벽이 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애급 군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뒤를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넌 후 모세는 다시 지팡이를 홍해에 내밀었습니다. 홍해가 다시 합하여졌습니다. 애급 군사들은 모조리 바다에 빠져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믿음으로 가는 길은 놀라운 길입니다.


 


1. 그 길, 지나놓고 보아야 아는 길.


가나안으로 가는 믿음의 길은 지나놓고 보아야 아는 길입니다. 지날 때에는 왜 그리로 가야 하는 지 모르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왜 자기들을 홍해 앞으로 인도하지 알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매장지가 없어서 이 곳으로 인도하였느냐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도 하나님이 왜 홍해 앞으로 인도하였지 몰랐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애급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 하도록 군사들을 죽여 버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또 이해 못 할 것이 있습니다.


애급에서 가나안까지는 불과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왜 40년 걸리게 하셨을가 하는 의문점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는 바란광야 가데스 바아네에서 정탐군 12명을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40일간 그 땅을 담지하고 돌아온 12명은 온 백성들과 모세앞에서 결과 보고를 하였습니다.


10명이 먼저 보고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 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김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13;27-28)


 


이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원망의 화살을 던졌고 불평의 언어를 토하며 후회의 샘물을 품어대며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13;30)라고 말하며 지금 쳐들어 가자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정탐군은 또 외쳤습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 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를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을 것이니라”(13;32-33)


 


이런 부정적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가나안 땅으로 갈 용기가 생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 가지 못 하리라......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에서 탐지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40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단정코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14;27-35)


 


하루가 일년이 되고 40일이 40년이 되었습니다.


40은 성경에서 시험의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광야에서 금식기도를 하신 것은 구세주로서 영적 일을 감당하기 위한 시험의 기간이었습니다(4;1-2)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요나가 40일간 니느웨성에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라고 외친 것은 니느웨성을 향한 회개의 시험기간이었습니다(3;4) 니느웨성 사람들은 승리하였습니다.


모세가 40일간 산에서 금식하며 성막과 십계명과 율법 613가지를 받은 것은 모세가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지를 시험당한 기간이었습니다(34;28) 모세도 이 40일의 시험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40일간 정탐하고 돌아 온 12 정탐군중 10명은 불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40년이나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40일은 시험의 수이고 40년은 형벌의 기간입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인 댓가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40일 시험에서 불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40년의 형벌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걸은 길은 형벌의 길이었습니다. 지나놓고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체스터손(Chesterson)이라는 사람이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울타리가 세워진 이유를 알기 전에는 그 울타리를 결코 헐지 말라.”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이런 경우라면 어떻게 말하겠니? 부부가 배를 타고 여행중에 배가 파선하게 되었습니다. 구명정에는 한 사람밖에 탈 수 없었습니다. 둘이 타면 둘 다 죽습니다. 이 때 남편이 아내를 남겨놓고 구명정으로 올라 육지로 배를 젖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내는 침몰하는 배위에서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남편을 향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기하던 교수가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아내가 무엇이라고 소리질렀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내가 눈이 삐었지. 저런 것을 믿고 결혼하였나?”


학생들은 줄줄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저승에 가서 귀신이 되어 보자.”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할 때 한 여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교수님! 우리 아이 잘 부탁해! 이렇게 말하고 죽어갔을 것같아요.” 깜짝 놀란 교수가 물었습니다.


너 이야기 들어 보았나요?”아니요. 우리 어머니가 돌아 가실 때 내 앞에서 아버지에게 우리 아이 잘 부탁해! 그리고 돌아 가셨어요.” 교수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랬구나! 뒷 이야기를 합니다. 남편은 돌아 와서 딸을 잘 길렀습니다. 그가 죽었습니다. 유품을 정리하던 딸이 아버지 일기장을 보았습니다.


 


그 때 나도 당신을 붙들고 같이 죽고 싶었었지요. 미안해! 여보!. 우리 둘 다 죽으면 우리 딸을 기를 사람이 없어지지. 당신은 그 때 중병에 걸려 몇 달 못 산다는 진단을 받고 마지막 여행중이었지. 딸 때문에 홀로 구명정에 오르던 내 심정은 찢어지는 것같았지. 그 때 당신이 우리 아이 부탁해요! 라고 소리지를 때는 미치는 것같았지.”


그 길은 지날 때에는 왜 그리로 가야하는 지 모르는 길입니다. 지나놓고 보아야 아는 길입니다.


 


2. 그 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


가나안으로 가는 믿음의 길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이끄는 길은 곧장 난 길이 아니었습니다. 흔적을 그려 보면 방황하는 길같이 보이는 길입니다. 그러나 순간마다 때마다 곳마다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시는 길이었습니다.


바다가 있으면 갈라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적들이 있으면 돌아서 피해가게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물이 없으면 반위를 갈라서 샘물이 나게 하시며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광야라 먹을 것이 없으면 만나를 하늘에서 쏟아 주시면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을 때는 동풍을 불어서 메추라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인 곳으로 몰아 주시며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40년 동안 신발을 닳지 않게 보호하여 주시면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없는 광야라 하나님은 옷도 헤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시면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으로 100m도 걸을 수 없는 곳이라 구름기둥으로 햇빛을 가려 주시면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밤이면 추워서 잘 수 없는 사막 지대라 불기둥을 보내 주셔서 따뜻하게 보호하여 주시면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가는 믿음의 길에 가장 적당한 방법을 사용하시면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매일 기적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날마다 기적으로 인도하여 주신 기적의 길이었습니다.


동행의 표적이 없는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기적이 있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시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길로 가면 기적이 있고 표적이 있습니다.


그 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길입니다.



종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공간종교(空間宗敎)와 시간종교(時間宗敎)가 있습니다. 공간종교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입니다. 세속이라는 공간을 떠나 산속이라는 공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장소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공간종교가 아닙니다. 어느 곳이든지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십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이 지성소입니다. 공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시간에 그 곳에 역사하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게 되면 하나님이 항상 인도하여 주십니다.



나는 수도학을 공부하던 중 거룩하게 살아간 수도사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수도사들의 삶은 복음의 최고 질을 살았던 이들입니다.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로 알려진 니콜라스 헤르만 “30년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다리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55세에 갈멜 수도원에 들어 갔습니다. 수도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의 첫 걸음은 헌신입니다. 그는 청소하고 빨래하고 잡일을 하는 심부름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감사하며 일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저런 천사들을 받들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접시를 닦으면서도 감사하며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20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모든 수도사들이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원장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수도원장을 뽑을 때 수도사도 아니었던 그가 표를 제일 많이 받았습니다. 일약 수도원장이 되었습니다.


그 길은 처음에는 몰라도 지나놓고 보니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었습니다.


 


기도하고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더 좋게 하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앞에 메고 가면서 기도하였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은 법궤가 생기기 전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행진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우리의 길이 평탄케 하옵소서!” 그런데 평탄하지 못 한 길이 나타났습니다. 기도하고 안 되는 것은 더욱 축복입니다.


 


3. 그 길, 축복의 길.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길, 가나안으로 가는 믿음의 길은 축복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는 길로만 가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살던 애급 땅을 떠나 가나안으로 갈 때에 꼭 구름기둥만 따라 갔습니다.


모세가 마음대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12 족장들이 회의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평탄한 길로 순조롭게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원하는 길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난 길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꼭 구름기둥이 가는 길로만 갔습니다.


알고 보니 그 길은 축복의 길이었습니다.


 


부모의 최고의 소원은 자녀가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소원은 우리가 잘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 대학생이 우연히 채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기독교 계통 대학에 학점을 따기 위 하여 갔다가 채플에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채플시간에 의무적으로 마지 못 해 앉아 있으면서 비아량거리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열정적으로 설교한 후에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낄낄 웃으면서 그 청년 옆구리를 툭 쳤습 니다.


어이. 예수가 자네를 부르는 군. 빨리 나가 보라구. 혹시 장학금을 줄 지 알아?”


학생들은 책상을 치며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 마음속에는 주님이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곧 일어나더니 목사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겠노라고 말했습니 다. 그 청년이 바로 스탠리 죤스 박사였습니다. 그는 후에 힌두교 국가인 인도에서 수십만명 에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용병이 되었습니다. 큰 영적 거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로 가면 축복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은 바다도 막지 못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 지나놓고 보아야 알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그 길, 축복의 길입니다.


모세가 한 말을 기억하여 보십시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13-14)


 


앞뒤 좌우가 막히면 우선 위를 보십시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위를 보라는 말입니다.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벳세다 광야에 5천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먹을 것은 52어 밖에 없었습니다. 막연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 지 마태는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14;19)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는 하늘을 보십시오.


모세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기 10억 수표가 있습니다. 찢어졌습니다. 버릴 가요? 소중히 여기며 은행으로 가지고 갈 것입니다.


여기 100만원짜리 옷이 있습니다. 흙이 묻었습니다. 버릴 가요? 빨아 다시 입으면 됩니다.


내 인생 망가진 것같아도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기에 하나님은 다시 고쳐 쓰십니다.



심리학에 변화 심리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세계 최고 권위자는 앤서니 라빈스입니다. 그가 쓴 책중에 저의 관심을 끄는 책이 있습니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우라.”


여러분은 위대합니다. 큰 일 할 수 있습니다. 가다가 막히는 길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길입니다.



사울 아버지가 나귀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들 사울에게 나귀를 찾아 오라고 말했습니다. 며칠 동안 찾아도 못 찾았습니다.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습니다. 지나놓고 보니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나귀를 잃어 버리게 하시고 사울이 찾으러 다니게 하시고 사무엘을 만나게 하시고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귀를 찾게 하여 달라고 며칠 기도하여도 못 찾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섭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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