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타임캡슐 (강문호 원로목사)

봉쇄 수도원 영성 회복의 과제( 계 17;1-5. 2018.10.21)
2018-09-23 09:32:59
강문호
조회수   997

                 




                                             봉쇄 수도원 영성 회복의 과제




                                                                             계 17;1-5.


 


그 동안 긴장하며 기도하였던 봉쇄 수도원 생활을 115일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봉쇄 수도원을 세운다고 하니까 많은 분들이 관심있는 질문을 주셨습니다. 빈정거리며 독이 들어 있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언제나 처음 하는 일에는 그런 과정이 따르는가 봅니다. 내가 30년 전에 성막 쎄미나를 시작할 때에도 그랬습니다.


 


강 문호 목사는


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 하는 가?


왜 성막을 강의하는 가? 성막은 A4 5장 이상 쓰면 이단이다.


왜 신약 시대에 구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가?


왜 예수피 시대에 짐승피로 가는 가?


왜 예수 죽음 시대에서 짐승 죽음으로 가는가?


왜 복음 시대에 율법으로 가는가?


왜 기독교 시대에 유대교로 가는 가?”


 


처절할 정도의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2674만명 이상 목사님들이 성막을 공부하고 나니까 성막은 복음의 뿌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알려면 성막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접으면 성막이고, 성막을 펼치면 오직 예수임을 알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지금 봉쇄 수도원을 세우면서 똑같은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묻는 중에 가장 중요한 질문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왜 천주교로 가려는 가?


2. 사람들이 다 수도사가 되면 누가 세상에서 사는 가?


3. 예수님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는 데 왜 세상을 등지고 도피하는 가?


 


이에 대한 뚜렷한 답이 있습니다.


 


1. 왜 천주교로 가려는 가?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은 수도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천주교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도원은 천주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천주교는 수도원을 정교회에서 빌려 왔습니다. 정교회 수도원은 천주교 수도원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앞서 있습니다. 아토스 성산 수도원은 수도원의 핵심입니다. 정교회 수도원입니다. 규모나 숫자나 전통에 있어서 천주교는 정교회 수도원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정교회 수도원에서 수도를 배워서 천주교로 옮긴 사람은 카시안입니다.


왜 정교회로 가려는 가?


이렇게 묻는 것이 더 정통적 질문입니다. 그런데 정교회 수도원의 뿌리는 성경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수도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속하여 있었던 쿰란 공동체가 수도원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 수도원입니다.


예수님과 12명 제자 공동체가 수도 공동체입니다.


수도원의 뿌리는 성경입니다. 천주교가 아닙니다. 수도원 운동을 천주교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가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이 다 수도사가 되면 누가 세상에서 사는 가?


세상 사람들이 다 수도사가 되면 안 됩니다. 몇 명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몇 명은 꼭 필요합니다. 군인은 적과 대면하여 싸우라고 존재합니다. 그러나 싸우게 하려고 뒤에서 탱크를 만들어 주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탄알을 만들어 계속 공급하여 주는 군인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수여야 합니다. 대다수는 전선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뒤에서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훈련하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수도원이고 수도사입니다.


수도원에서 수도원의 영성을 받고 세상에서 수도원 영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변화산에서 변화되신 예수님은 그 곳에 초막짓고 살자는 제자들의 권유를 뿌리치시고 산아래로 내려 오셨습니다. 변화산의 영성은 변화산 밑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수도사는 사명받은 몇 명만 있으면 족합니다. 수도사는 특수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일뿐입니다.


 


3. 예수님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는 데 왜 세상을 등지고 도피하는 가?


나는 많은 봉쇄 수도원을 다녀 보았습니다. 갇혀 있는 봉쇄 수도사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왜 세상을 등지고 사나요?”


그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세상을 등진 것이 아닙니다. 세상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내가 세상에 있으면 한 주에 100명 만나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이 곳에 숨어 묻히니까 한 주에 1000명 정도를 만나요. 수많은 이들이 방문하여 같이 대화하며 하나님 이야기를 나눕니다. 더 세상으로 깊이 들어 왔어요.”


 


그렇습니다.


수도원은 구시대 유물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추구입니다.


수도원은 천주교 전통이 아니라 성경적 모델입니다.


수도원은 도피 아니라 세상 포용입니다.


수도원은 사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의 잊혀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수도원은 무의미가 아니라 영원을 찾는 순례입니다.


수도원은 세상을 등짐이 아니라 기도의 화력을 일으키는 기도 발전소입니다.


수도원은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부요 창고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은 외적 고통의 회피가 아니라 내적 전쟁터로의 참전입니다.


수도원은 영적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독한 겸손으로 내려감입니다.


수도원은 체험 추구가 아니라 조용한 침묵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은 매력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 이방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을 받는 것입니다.


수도원은 자기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비움입니다.


수도원은 혈연 가정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 가정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은 현실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보는 것입니다.


수도원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오아시스에 머무름입니다.


수도원은 육적 생활의 기피가 아니라 영적 보화의 탄광 개발입니다.


수도원은 고행이 아니라 자유함입니다.


수도원은 입술의 떠남이 아니라 귀사용의 시작입니다.


수도원은 세상에 대하여 말하기를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듣지 아니하려함의 침묵입니다.


수도원은 울면서 떠나는 길이 아니라 웃으면서 머무는 안식처입니다.


 


더 빛되고 더 소금같아 지려고 몸부림치는 곳이 수도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수도원 영성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가요? 세 가지로 회복이 필요합니다.


1. 뿌리 영성 회복


2. 수도원 근본 영성 회복


3. 성경 영성 회복


 


1. 뿌리 영성 회복


우리 개신교의 시야는 마르틴 루터 이후만 보고 있습니다. 1517년 이전은 보지 못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는 항상 현대 신학만 공부하였습니다. 내가 신학교 다닐 때에는 칼 바르트, 블트만, 몰트만 이야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뿌리는 동방 정교회, 서방 천주교입니다. 그 뿌리는 초대교회입니다. 초대교회 정통을 동방 정교회는 그대로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서방 카토릭은 균형을 상실하였습니다. 교황 무오, 성직자 독신제도, 마리아 승천설등이 섞이며 여러 과정을 통하여 변질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의 뿌리는 초대 교회를 그대로 이어갔습니다.


이런 과정을 알고 우리 감리교 목사중에 정교회로 적을 옮겨서 정교회 신부로 사역하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뿌리를 찾아 헤메다가 감리교에서 정교회로 옮긴 것입니다. 그 분의 과정을 직접 들어 보았습니다.


유대교, 동방 정교회, 서방 천주교는 개신교회의 뿌리입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 잘 한 것도 있고 잘못한 것도 있습니다.


 


a. 안 가지고 나와야 할 것은 버리고 나왔습니다. 잘 했습니다. 교황 무오, 독신 제도 마리아 승천설, 연옥, 이런 천주교의 핵심은 버리고 나왔습니다.


b. 수정하여 가지고 나와야 하는 데 그대로 가지고 나온 것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에는 개신교 교리와 전혀 맞지 않는 부분이 몇 가지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지금 사도 신경을 고쳐서 사용하고 있지만 아직도 고치지 않은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c. 가지고 나왔으면 좋았는 데 안 가지고 나온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유대교, 정교회, 천주교에서 지금 지니고 은혜롭게 사용하고 있는 데 개신교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좋은 것들은 회복하는 것이 좋을 것같습니다.


 


1. 촛불


유대교, 정교회 그리고 천주교에서는 촛불을 키고 예배를 드립니다. 개신교도 촛대를 아예 전기로 만들어 밝히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불붙이는 초여야 합니다. 정교회 데살로니카 시메온 주교는 초의 상징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a. 초는 밀랍으로 만들어집니다. 밀랍은 벌이 꽃에서 따오는 순수하고 달콤한 물질입니다. 매우 아름다운 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깨끗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에 불을 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b. 밀랍은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상이든지 조각하지 쉽습니다. 예민하게 조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람 얼굴을 만들 때에는 밀랍으로 만들어서 밀랍 인형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고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서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게 맡기는 의미도 있습니다.


c. 초는 자기 몸을 붙태우면서 주변을 밝게 하여 줍니다. 이처럼 성도는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5;4) 그러기 위하여는 자기 몸이 불타 사라져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촛불을 밝히고 예배드리며 더욱 경건하고 의미있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2. 십자가 성호


정교회에서는 엄지부터 세 손가락을 모읍니다.


그리고 이마에 대고 성부와


명치까지 내려 대고 성자와


오른 편 어깨에 대고 “”


왼 편 어깨로 가며 선을 긋고 왼 편 어깨에 대며 령의 이름으로


이렇게 예배때 성호를 긋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집에서 어디에서나 항상 같이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다 같은 데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가는 것만 다릅니다.


세 손가락을 모으는 것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수시로 십자가를 그리는 자체가 나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를 정교회 대주교 소티리오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호를 그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a. 성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그 분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b. 성호를 그으면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받아 드리게 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c. 오른 손의 세 손가락을 모아 성호를 그으면서 우리는 삼위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d.“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벧전 5;8) 악마의 화살로부터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보호하여 줍니다. 십자 성호를 그음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주님의 은총과 보호아래 있다는 사실을 표시하는 일종의 도장을 우리 영혼과 육신위에 찍어 놓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 끼릴로수 주교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호의 인장을 올바르게 신앙을 고백하는 자세로 찍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잠들기 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집을 나설 때,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식사전에 그리고 식사를 마친 후 잊지 말고 십자 성호를 그어야 합니다.”


 


늘 십자가를 그리는 습관입니다. 유대교는 십자가를 인정하지 않기에 하지 않지만 정교회, 천주교는 늘 십자 성호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십자가를 늘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확실하게 알리며 전도의 효과도 있습니다.


 


3. 향 피우기


개신교는 향을 피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정교회 그리고 천주교는 향을 피우며 예배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속죄일에는 지성소에도 향을 피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평일에는 늘 분향단에 향을 피웠습니다. 일년 365일 향피우기가 그쳐지지 않게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까지 향피우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스가랴 대제사장이 분향단 앞에서 세례 요한 탄생을 계시받았습니다(1;8-11)


사도시대에도 향피우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분향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a. 기도는 향연을 타고 상달됩니다.


다윗은 말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141;2)


“24 장로들이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5;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데잔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지라(8;3-4)


 


b. 사제는 향을 하늘을 향하여 올리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드리는이 분향을 받아 주시고 우리에게 성령의 은총을 보내 주소서!”


이 때 성도들은 고개를 숙이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은총을 보내달라고 같이 간구합니다.


 


c. 향이 타면서 행내를 풍깁니다. 이 때 향내는 맡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향기를 세상에 품어 내도록 기도합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4. 성전 천청의 돔 모습


유대교, 정교회, 천주교의 건축 양식은 모두 지붕위에 돔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경이적인 성전이라면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소피아 성당입니다. 모두 돔으로 되어 있습니다. 돔은 하늘나라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입니다. 성전안에 들어가서 천장을 보면 하늘나라에 들어 온 것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돔의 정상에는 꼭 예수님 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신다는 상징입니다. 어떤 성전을 짓든지 돔은 필수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일정한 건축 양식이 전혀 없습니다.


 


5. 성독(聖讀. 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


역사상 큰 사람들은 거의 독서광이었습니다. 워렌 버펫은 컬럼비아 대학을 4년 다니면서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고 졸업하였습니다. 오프라 윈프리의 손에서는 책이 떠나지 않습니다. 나포레옹은 전쟁할 때에도 책을 따로 수레에 실고 다니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독서 중에는 성경 독서입니다. 성경은 거룩한 책이기에 거룩하게 읽어야 합니다.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두 말이 합해져 있습니다. Lectio는 독서하는 말입니다. divina는 거룩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렉시오 디비나는 거룩한 독서또는 성독(聖讀)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spiritual reading입니다.


귀고 2세는 렉시오 디비나를 영적 사다리”(The Ladder of Monks)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는 4 사다리를 놓았습니다.


 


a. 독서


b. 묵상


c. 기도


d. 합일


 


이를 알기 쉽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a. 보기


과일 가게에 가서 일단 진열되어 있는 과일들을 둘러 봅니다. 각종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어느 부분을 읽습니다. 성경을 봅니다.


 


b. 찍기


많은 과일중에 싱싱하고 먹음직한 과일, 왠지 모르게 당기는 과일이 눈에 띄입니다. 그 것을 사기로 정합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찍습니다.


 


c. 씹기


그 과일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씻습니다. 껍질을 벗깁니다. 먹기 좋게 자릅니다. 그리고 입에 넣고 잘 소화되도록 씹습니다. 물도 마시고, 소금도 칠 때가 있고, 설탕을 넣을 때도 있습니다. 주어진 말씀을 되새김질 합니다. 묵상하고 생각하고 이 것 저것과 연결도 시켜 봅니다. 반추 동물의 되새김입니다.


 


d. 넣기


잘 씹은 과일을 넘깁니다. 위에 넣습니다. 그 때부터 내가 할 일은 없습니다. 위가 알아서 합니다. 창자를 통과시키면서 영양분을 창자가 흡수합니다. 피가 온 몸에 공급합니다. 몸은 그 영양을 에너지 삼아 활동합니다. , 창자, , 세포가 건강하여야 합니다. 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이 때 하나님과 합일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수도사들은 성경 한 권만 가지고 동굴에 들어가서 몇 년 동안 지내며 렉시오 비디나로 성경을 읽으며 합일의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성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뽀르 피리우스는 말했습니다.


성경을 알면 성자가 된다.”


 


이렇게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성독, 렉시오 비디나를 도입하면 좋을 것입니다. 나는 수도원에서 매일 하루에 한번 할 것입니다. 기록으로 남길 것입니다.



 




6. 예수 기도


예수 기도는 별명이 있습니다.


주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기도문이 너무 짧아서 화살기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헤시카즘(Hesychasm) 기도라고도 합니다. 예수 기도(헤시카즘)는 아토스의 수도사들에게는 필수적인 기도법입니다. 13 세기 중엽에 아토스의 수도사 니케아포로스(Nikephoros)가 기도법으로 정착시켰습니다. 정교회에서는 아토스를 영성의 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추가 라브라 수도원입니다. 이 곳에서 정착되어 내려온 기도법입니다.


헤시카즘은 고요” “정적(靜寂)”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헤시키아에서 온 말입니다. 동방 정교회의 헤시카즘 기도는 서방 기독교의 콰이어티즘(quietism)과는 다른 기도법입니다. 묵상 기도 수준이 아닙니다. 말하기는 적게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많이 들으려고 하는 기도법입니다. 예수 기도는 다음과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셋 중에 아무 것이 사용하여도 좋습니다. 그러나 한번 사용하기 시작한 말은 계속 그 말로 반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기도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자기를 하나님 앞에 낮추는 것이 영적 건강의 최고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단계에서 이렇게 낮춥니다.


나는 티끌보다 못 한 존재입니다.”


야곱은 이 단계에서 이렇게 낮춥니다.


나는 지렁이같은 존재입니다.”


바울은 이 단계에서 이렇게 낮춥니다.


나는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베드로는 이 단계에서 이렇게 낮춥니다.


나는 안개와 같은 인생입니다.”


 


예수 기도에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기도 매듭입니다. 양털로 12매듭, 33 매듭, 50 매듭 또는 100개 매듭이 있습니다. 양털을 사용하는 이유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우리 죄르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목자되신 예수님을 연상하며 기도하도 합니다. 한 개씩 넘기면서 기도합니다. 지금은 묵주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내용도 중요하고 형식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정교회 수도사들은 수도사 안수를 받을 때 한 손에는 십자가를 쥐어 줍니다. 다른 손에는 양모 매듭 묵주를 선물로 받습니다.


 


예수 기도와 세라핌 신부


이런 기도를 한 수도사중에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러시아 사라보의 성 세라핌 신부입니다. 18세기 사람입니다. 동장 정교회 수도법을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산속에서 이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맹수들이 접근하여 오면 강아지 다르둣이 하면서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산속에 짐승들과 함께 살면서 농사지으면서 자급자족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천일동안 이 기도를 계속 하기도 하였습니다. 주야로 쉬지 않고 1000일동안 이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찾아 오는 이들을 치유하였습니다. 은사 목회를 하였습니다. 하루 방문객이 1000명이 될 때도 있었습니다. 자연과 인간 모두를 향한 목회를 예수 기도로 하였습니다.


모스코바 성 다닐로프스키 수도원 소성당에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소장품도 그 곳에 있습니다. 그가 사용하였던 묵주는 특이합니다. 촘특기(묵주)는 밤알만한 크기 정도입니다. 그는 산에서 열매를 따나서 묵주를 만들고 성령의 열매 맺기를 사모하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세라핌 성인이 성령의 열매를 충만하게 맺었던 증거가 있습니다. 그 분의 제자 모토필로프가 전해주고 있습니다.


흰 눈이 온 대지를 덮었던 때였습니다. 밝은 태양이 눈부시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모토필로프가 세라핌을 보았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얼굴이 모세 얼굴처럼 눈이 부셔서 볼 수 없었습니다. 세라핌이 물었습니다.


왜 나를 바라보지 않느냐?”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습니다.”


스승은 그의 어깨에 손을 대고 말했습니다.


. 이제 내 얼굴을 바라보아라.”


그는 스승의 얼굴을 바라 보았습니다. 해같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순간 기쁨과 평화가 체험되었습니다. 변화산에서 변화되신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창조되지 아니한 빛(Uncreated light)입니다. 이 빛에 대하여 14세기 팔라므의 성 그레고리오가 신학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정교회 교의로 인정받았습니다.


 


예수 기도는 고요함속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는 지름길이며 신화를 향한 올바른 길입니다.


 


2. 수도원 기본 영성 회복


봉쇄 수도원에는 기본적인 영성이 흐르고 있습니다. 엔진이 없으면 자동차가 아니듯이, 나무가 없으면 숲이 아니듯이, 이런 영성이 없으면 수도원이 아닙니다. 봉쇄 수도원의 영성은 5가지입니다.


 


1. 청빈


수도원의 기본 영성은 청빈입니다. 수도원에서 사유재산을 모으는 수도사는 없습니다. 사유화된 기도원이나 소유주가 있는 수양관을 아예 수도원이라는 말을 빼야 합니다.


정통적인 수도원은 3개월마다 재정을 다 없애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합니다. 은퇴를 앞둔 목사님이 내게 말했습니다.


은퇴금 10억을 받을 예정입니다. 가지고 들어 가고 같이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유효기간은 3개월입니다. 우리 수도원도 3개월마다 남는 돈은 다 없앨 예정입니다.”


아무 것도 없어요. 더 필요한 것 없어요.”


이렇게 살아가는 영성을 회복하여야 진정한 수도원입니다.


 


2. 거룩


수도원의 영성중에 중요한 영성은 거룩입니다. 성결입니다. 지구의 청정 지역은 남극과 북극입니다. 땅의 청정지역은 수도원이어야 합니다. 거룩함을 보고 싶으면 수도원에 와야 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 거룩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거룩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닙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주를 보지 못 합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 하리라” (12;14)


수도원은 거룩을 회복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3. 순복


수도원 영성중에 중요한 영성은 순복입니다. 세 가지 순복입니다. 하나님께 순복, 수도원장에게 순복, 선배에게 순복입니다.


아토스 성산에 갔습니다. 여자가 없는 나라이기에 태어나는 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아토스 수도사들은 100%가 이민 온 수도사들입니다. 수도사로 지원하여 오게 되면 일년 동안 수도원에서 가장 밑바닥 일을 합니다. 청소, 빨래, 식사, 목축등을 합니다. 그리고 수도사로 지원하면 대부앞으로 와서 수도사 입회 예식을 합니다. 그 때 지원 수도사는 수도원에서 정해준 대부앞으로 나옵니다. 그 때 긴 거리를 기어 와야 합니다. 대부앞에 온전히 엎드리는 것입니다.


대부는 가위로 머리를 십자가 형으로 자릅니다. 수도복을 입힙니다. 그리고 수도사가 됩니다.


요즈음 나라도, 교단도, 교회도 어른이 없습니다. 그 어른 한 마디면 질서가 생기는 어른이 없습니다. 어른이 있다고 할 지라도 아랫사람이 듣지 않습니다. 어른만 없는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도 없습니다. 순복의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 수도원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4. 노동


수도원의 중요한 영성은 노동입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수도원 영성은 헌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막의 수도사들도 일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막의 수도원들은 해빛이 많고 물이 없는 것에 착안하여 향료를 재배하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향료는 이스라엘 수도사들이 사막에서 만든 형료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아브닷 사막에서 로마까지 향료길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땅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나도 2년 전부터 고구마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땅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거름준만큼, 물을 준만큼 성장합니다. 정직한 땅에서 정직하게 농사지어 생활하려고 합니다.



 




5. 정주


수도원 영성중에 중요한 영성이 있습니다. 정주입니다. 한 곳에 끝까지 머믈며 수도합니다. 변치 않습니다. 나무는 태어난 곳에 쓰러져 죽습니다. 연어는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일생을 마무리합니다.


아토스 성산에 들어 온 수도사들은 아토스를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안에 들어 온 사람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변치 않는 마음으로 변치 않는 자리에서 변치 않는 분을 향하여 살아가는 것이 정주입니다. 이런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 수도원의 사명입니다.


 


3. 성경 영성 회복


성경은 <태초에>로 시작하여 <종말에>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면 과거를 알 수 있고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예언과 성취의 반복이 성경입니다.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 역사입니다.


그런데 성경 끝 요한 계시록 20,21, 22장은 천국입니다. 성경의 결론은 천국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천국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앞에 17, 18장 그리고 19장은 큰 성 바벨론입니다. 무너질 세상입니다. 세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1. 돈 문화(17;4)


2. 음란 문화(17;2)


3. 배교 문화(17;3)


 


이런 세상 문화에 빠지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이 세 문화를 이길 수 있는 영성은 수도원 영성입니다.


 


돈 문화를 덮을 청빈 영성


음란 문화를 덮을 거룩 영성


배교 문화를 덮을 오직 예수 영성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영성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나는 115일 수도원 첫 예배를 시작으로 봉쇄에 들어 갈 것입니다.


 


1. 기독교 뿌리 영성을 찾을 것입니다.


2. 수도원 기본 영성을 회복할 것입니다.


3. 성경 영성을 추구할 것입니다.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1 2 3 4 5 6 7 8 9 10 ... 83